11일 방역복과 위생모를 갖추고 들어선 녹십자 화순공장 완제의약품 포장시설에서는 국내 기술로 개발한 탄저백신이 담긴 바이알(주사약 등을 담는 작은 병)이 쉴 새 없이 밀려 나오고 있었다.
생물테러와 공중보건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지금까지 전량 수입해 온 탄저백신을 국내 기술로 생산·비축하는 현장이었다.
탄저균은 '공포의 백색 가루'로 불리며 9·11 직후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생화학 테러의 공포에 몰아넣은 세균이다.
식품으로 섭취하는 것 외에 호흡기를 통해서도 퍼질 수 있는데 이처럼 호흡기로 감염되는 흡입탄저는 항생제 치료를 하지 않을 경우 치사율이 97%에 달해 대표적 생물학 무기로 꼽힌다.
이에 정부는 1997년 기반 연구를 시작하고 2002년부터 탄저백신 공정 개발과 비임상시험을 진행했다.
2008년부터는 임상시험에 들어갔고, 올해 초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품목허가를 받았다. 기반 연구를 시작한 지 28년 만이다.
정부는 그간 전량 수입에 의존했던 탄저백신을 국내 독자 기술로 생산·비축할 수 있게 되면서 수입 비용을 아끼는 것뿐 아니라 '국가안보 역량' 자체를 끌어올렸다고 강조했다.
필요할 때 언제든 백신을 신속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과 생산력을 갖춘 점 자체가 이미 탄저균을 이용한 생물테러에 노출될 가능성을 낮춘다는 것이다.
김갑정 질병청 진단분석국장은 "국민이 안전하게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부가 미리 여기(테러 위협 등)에 대응할 무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녹십자 화순공장 측은 연간 최대 250만명이 접종(4회 접종 기준 1천만 도스)할 수 있는 생산 능력을 갖췄고, 위급한 상황이 생길 경우 6개월 안에 새롭게 완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고 밝혔다.
새 백신의 특징은 비병원성 세균을 활용했다는 점이다.
기존의 수입 백신이 병원성 탄저균에서 추출한 성분을 사용해 독성 부작용 우려가 있었던 것과 달리, 새 백신은 독성을 없애 안전성을 높였다.
정윤석 질병청 고위험병원체분석과장은 "병원성을 가진 탄저균을 키우고 여기서 (항원을) 정제한 경우 미세하지만, 다른 반응(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들이 있는데 완전히 독성을 배제한 형태의 단백질을 개발해서 큰 의미를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28년 만에 결실을 얻었지만,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질병청과 녹십자는 현재 24개월인 백신의 유효기간을 연장하고 적용 범위를 확대할 수 있도록 연구를 이어갈 계획이다.
아직 탄저병이 풍토병인 아프리카와 일부 아시아 지역, 그리고 미국산 백신에 의존하고 있는 국가를 대상으로는 수출도 타진한다.
탄저백신은 독감백신처럼 일반 국민이 대규모로 접종하는 것이 아니라 테러와 공중보건 위기에 대비해 비축하는 전략물자인 만큼 안정적인 생산·비축을 위해 국가 차원의 예산 확보도 중요하다.
최근 확정된 2026년도 정부 예산을 보면 탄저백신 비축을 위한 예산은 약 32억원으로 올해(48억원)보다 16억원가량 줄었다. 국회 심사 과정에서 증액 필요성이 언급됐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녹십자 관계자는 "(탄저백신 생산 시설은) 탄저 전용으로 구축했기 때문에 생산이 없는 기간에도 유지·보수를 해야 한다"며 "신약을 개발할 때는 국민 보건에 더해 회사의 성장도 중요한데 내년도 예산이 많이 줄어 이러한 점이 숙제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