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근의 'K-리큐르' 이야기…수수소주와 고량주

 여주 흔암리 선사시대 유적은 우리나라의 청동기 시대 전기를 대표하는 마을 유적이다.

 유적은 지난 1972∼1977년까지 서울대학교 박물관과 고고학과의 합동 연구에 의해 발굴됐다.

 총 16기의 집자리가 조사됐는데 집자리 내부에서는 화덕 자리와 기둥 구멍, 저장 구덩이가 발굴됐다.

 특히 눈길을 끄는 점은 12호 집자리에서 다량의 탄화미와 보리, 조, 수수 등의 곡물이 출토됐다는 사실이다.

 

 수수를 크게 보면 메수수와 찰수수로 구분되는데 그중 술을 빚는 데 사용되는 종류는 찰수수다.

 고려시대 원나라를 통해 술 증류법이 들어온 이후 우리 조상은 수수로도 당연히 술을 빚었고 증류해 수수소주를 만들어 마셨다.

 그런데 사실 각종 고문헌에는 그 존재는 언급됐지만 제조법은 나오지 않았다.

 1924년 출간된 우리나라 근대 3대 요리책 중 하나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는 수수소주에 대해 '수수는 여러 곡식보다 매우 흔할 뿐 아니라 수수로 소주의 밑술을 만들면 소주 생산량을 많이 늘릴 수 있고 맛도 독해 많은 이가 수수로 소주를 만든다'고 쓰여있다.

 특히 다른 술보다 소주를 선호하고 또 수수 농사를 많이 짓던 평양 일대에서 수수소주를 많이 만들었고 그중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술이 우리가 잘 아는 문배주다.

문배주에 들어가는 조와 수수

 수수를 중국어로 고량(高粱)이라고 한다. 그래서 '수수술'을 한자로 쓰면 고량주가 된다. 중국에서도 수수로 만든 술을 마찬가지로 고량주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그 제조법이 우리와는 다르기에 둘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술이다.

 따라서 본 칼럼에서는 일반적인 용어인 고량주라는 단어로 쓰고자 한다.

 우리나라 고량주 역사를 보면 해방 이후 화교가 운영하는 고량주 공장들이 여럿 있었지만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화교 통제 정책으로 대부분 문을 닫았다.

 이후의 우리나라의 고량주 시장에는 대만산 수입 고량주와 함께 한국산 고량주가 있었다.

 우리나라 주류 제조사가 한국산 고량주를 만들며 그 맥은 계속 이어진 것이다.

 그중 유명한 회사로는 대구의 수성고량주가 있었다.

 1952년 주류제조업자명부에 등장하는 동천백주라는 양조장이 대구에 있었다.

 1958년에 인천 만취동 출신의 이경문 씨와 화교인 구비소 씨가 이 양조장을 인수해 만생주점(萬生酒店)이라는 고량주 양조장을 설립했다.

 이후 이씨와 구씨는 1960년대 초에 만생주점 자리에 '기린원'이라는 2층짜리 고급 중식당을 개업했다.

 그 자리에 있던 만생주점은 이름을 수성고량주로 바꾸고 대구시 수성구로 이전했다.

 여기서 회사명에 대해 잠깐 언급하면 수성고량주의 한자 수성(壽星)은 장수와 명성을 뜻하며 수성구의 '壽城'과는 한자가 다르다.

 1992년 중국과 우리나라가 수교한 이후 본격적으로 중국의 고량주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가격과 맛 등에서 우리나라 고량주가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수성고량주는 1997년까지는 한국에서 계속 생산하다가 중국으로 공장을 옮겨갔지만, 경영 악화로 사실상 거의 폐업 상태에 이르게 됐다.

 이후 OB맥주에서 20여년간 근무한 이승로 대표가 2010년에 수성고량주를 인수했다.

 이 대표는 경북대 발효생물공학연구소와 신제품을 개발해 새로운 술로 시장의 반응을 얻었다.   중국에서 주문자 생산방식으로 고량주를 생산한 다음 우리나라에 수입하는 방식으로 판매하고  있다.

 이러한 생산 방식의 변화로 현재의 수성고량주는 우리나라 기술이 일부 들어갔지만, 중국재료로 중국에서 만들고 있기에 우리 술이라고 하기는 다소 무리가 있다.

수성고량주 생산제품

 또한 수성고량주와 쌍벽을 이루던, 우리나라 고량주 업체로는 동해양조가 있다. 1967년 충북 제천에 설립된 동해양조는 고량주를 25∼30도로 낮춘 동해백주를 출시해 1980년대 초에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대표의 호텔사업 투자 실패와 장영자 어음사건 연루 등으로 인해 1985년에 폐업했다.

 동해양조가 파산하자 동해양조에 근무하던 직원들이 옛 동해양조의 시설을 법원 경매로 인수해 1986년 풍원양조를 설립했다.

 하지만 이 역시 경영난으로 1990년대 진로에 인수됐다. 진로 또한 결국 1993년 풍원양조를 폐업했다.

1980년대 동해백주 포스터와 신문광고

 수성고량주 공장의 중국 이전 후 한동안 국내 생산 고량주는 아예 없는 시대가 왔다.

 이후 '한국산 고급 고량주' 개발과 수출을 목표로 다시 한국산 고량주의 부활을 선언한 회사가 나타났다.

 ㈜한국고량주 농업회사법인(이하 한국고량주)의 양웅석 대표는 좋은 한국산 고량주를 만들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2012년부터 아들인 양원준 한국고량주연구소 소장과 함께 고량주 연구를 시작했다.

 양 대표는 지난 2017년에 상당한 연구 결과가 나오자 한국고량주 회사를 설립했다.

 2021년에는 직접 농사를 지은 무농약 수수와 수수 누룩을 사용해 첫 고량주인 김수한무(39도)를 출시했다.

 연이어 보급형 고량주인 서울고량주 레드(35도)와 서울고량주 오크(40도)를 출시했다.

 또한 방송인 이연복 중식 셰프와의 협업으로 이연 56(56도)과 이연 38(38도)도 성공적으로 론칭했다.

 양 대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초고도주인 극락(75도) 출시에 이어 제주 삼다수를 이용한 탐나고량주를 ㈜뉴월드와 협업해 생산하고 있다. 최근에는 프리미엄급 고량주인 서울고량주 블랙(50도)도 출시했다.

 그야말로 우리나라 수수로 만든 술에 대한 뚝심과 집중에 따른 성과다.

 이제 우리는 몇십년 만에 우리 땅에서 우리 수수로 만든 다양한 고량주를 맛볼 수 있게 됐다.

 또한 우리나라 고량주가 중국으로 수출돼 우리 고량주와 중국 고량주의 한판 대결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고량주 생산 고량주

 문화는 늘 변화하고 성장해왔다. 청동기 시대부터 수수를 먹어온 우리 민족이 우리나라만의 수수술을 만들어 마셔온 것 또한 변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게 'K-리큐르'는 전통의 역사를 머금고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신종근 전통주 칼럼니스트

 ▲ 전시기획자 ▲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 '미술과 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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