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순의 약이 되는 K-푸드…붉은 수수, 한민족 지탱한 한 그릇

 늦가을 바람에 붉게 익은 수수가 바람결에 흔들린다. 그 붉은 물결은 수확의 풍경만이 아니다. 척박한 땅에서도 깊게 뿌리를 내리고, 메마른 계절 속에서도 알곡을 맺는 생명력, 그것이 바로 수수다.

 화려하진 않지만 꿋꿋하고, 느리지만 끝내 결실을 이루는 그 모습은 한민족의 삶과 닮았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수수를 '복을 부르는 곡식'이라 불렀다. 붉은빛은 악귀를 물리치고 생명을 상징했기에 아이의 첫 돌상에는 반드시 수수팥떡이 올랐다. 붉은색은 생명의 색이자, 한민족 정신이 응축된 색이었다.

 물이 부족한 산간지대나 해풍이 거센 바닷가까지, 우리에게 허락된 땅은 넉넉지 않았다. 그 척박한 땅에서 가장 잘 자라준 곡식이 바로 수수였다. 비가 적어도, 흙이 거칠어도 수수는 쓰러지지 않았다. 땅이 메마를수록 뿌리는 더 깊어졌다. 이 강인함은 곧 한민족의 근성이기도 했다.

 문학 속에서도 수수는 생존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는 전쟁과 가난 속에서 고량밥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밥에는 포만감을 넘어선, 내일을 버티게 하는 의지와 희망이 담겨 있다. 쌀이 귀하던 시절 붉은 수수밥은 서민의 현실이자, 미래를 견디게 한 마지막 생명줄이었다.

 ◇ 동양의학과 약선으로 본 수수의 효능

 동양의학은 색을 오행으로 읽는다. 붉은색은 화(火)에 속하며, 불은 심장과 혈액의 기운을 주관한다. '본초강목'에는 "수수가 '온중'하고 '장위'해 '곽란'(음식이 체하여 배가 아프면서 위로는 토하고 아래로는 설사하는 증상을 동반하는 급성 위장병)을 멈춘다"고 기록돼 있다. 수수가 속을 따뜻하게 하고 위장을 안정시키며, 설사를 멈추게 한다는 뜻이다.

 약선학에서는 이를 '화중화'(和中和), 즉 몸의 안팎 중심을 고르게 다스리는 작용으로 본다. 몸의 중심이 편안해야 오장육부가 조화롭고, 기혈이 막히지 않는다. 그래서 수수죽은 병후 회복기에 좋은 보양식으로, 수수차는 위장이 약한 노인에게 이로운 양생차로 권해져 왔다. 수수 뿌리는 예로부터 이뇨·지혈 작용이 있어 폐렴, 천식, 산후 출혈 등에 약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대 영양학의 눈으로 봐도 수수는 놀라운 곡물이다. 수수 100g에는 약 9~11g의 단백질, 4~9g의 식이섬유, 풍부한 철분과 마그네슘, 비타민 B군 등이 들어 있다. 이는 쌀과 비교했을 때 단백질과 식이섬유, 무기질 함량이 훨씬 높은 수준이다.

 특히 붉은 수수의 껍질에는 프로 안토시아니딘, 타닌, 플라보노이드 같은 강력한 항산화 물질이 풍부해 활성산소를 줄이고 혈관을 보호하며, 염증 반응을 억제해 노화 속도를 늦추는 데 도움을 준다. 일부 연구에서는 수수의 폴리페놀 함량이 적포도주보다 더 높다는 결과도 보고된다.

 풍부한 식이섬유는 장내 유익균의 먹이가 되어 장 환경을 개선하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어 심혈관 질환 예방에도 유익하다. 혈당 상승 속도도 백미보다 느려 당뇨 관리와 대사증후군 조절에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있다.

 찰 수수는 단백질·지질이 높아 잡곡밥·떡·죽에 적합하고, 메 수수는 전통 엿과 막걸리·소주 등 술의 원료로 쓰인다. 한 알의 수수 안에 음식·약·문화·산업이 함께 들어 있는 셈이다.

 우리 조상은 밥상 위에 음양의 조화를 담았다. 따뜻한 성질의 수수와 서늘한 성질의 팥이 만나 수수팥떡이 된다. 이 떡은 음양의 균형을 맞추는 약선 음식이었다. 붉은 수수는 생명의 불을 상징하고, 검붉은 팥은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기운을 품었다. 그래서 돌잔치의 수수팥떡, 정월 대보름의 오곡밥은 모두 한 해의 안녕과 생명, 조화를 비는 의례였다.

 ◇ 손자병법으로 본 수수 요리

 손자병법의 첫 장인 '시계'(始計)는 전쟁의 모든 출발점이자 승패를 가르는 첫 단계다. 시(始)는 시작, 계(計)는 셈하고 세운다는 뜻이다. 전쟁이든 삶이든, 시작에는 반드시 원칙과 방향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동양철학에서 시작은 출발점이 아니라, 전체 흐름의 방향을 정하는 자리다.   자연의 운행, 계절의 변환, 인간의 생로병사까지, 시작이 바르면 끝이 편안하다는 통찰이 깔려 있다.

 한민족은 이 '시계의 도'를 밥상에서 실천해 왔다. 수수는 거칠고 투박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지혜가 고스란히 응축돼 있다. 수수밥, 수수죽, 수수팥떡, 수수부꾸미, 수수차 등은 삶의 방향을 세우는 '시계의 밥상'이었다.

 시계의 첫째 원리는 도(道), 조화다. 사람의 뜻과 자연의 이치가 하나 돼야 한다는 의미다. 수수는 바로 도의 곡식이다. 비가 적어도, 흙이 거칠어도, 주어진 환경 속에서 스스로 자리를 찾는다.

 다른 곡식과 잘 섞여 잡곡밥의 중심이 되고, 어떤 상차림에서도 조화를 해치지 않는다. 양생학적으로도 수수는 비위를 보호하고 불필요한 습을 제거하며, 혈액순환을 돕는다. 몸과 마음이 자연의 질서와 하나 되게 하는 조화의 음식이다.

 둘째는 천(天), 하늘의 때를 읽는 것이다. 수수는 하늘의 변화를 가장 잘 아는 작물이다. 가뭄에도, 초 서리에도 견디며 계절의 리듬에 맞춰 자란다. 우리 조상은 입하쯤 수수를 심고, 백로 무렵 붉게 물드는 이삭을 보며 하늘의 기운을 읽었다. 여름에는 수수죽으로 더위를 다스리고, 입동이 되면 수수밥으로 기운을 모았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먹거리를 조절하는 것, 이것이 곧 천(天)의 지혜이자 양생의 기본이다.

 셋째는 지(地), 땅의 형세를 아는 것이다. 수수는 땅을 가리지 않는다. 모래밭, 돌밭, 산비탈에서도 힘겹게 싹을 틔우고 알곡을 맺는다. 땅을 억지로 바꾸기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맞는 방식을 찾는 농사의 지혜를 보여준다.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다. 체질과 상태가 서로 다르기에 재료의 성질을 알고 조리법을 달리해야 한다.

 수수죽은 노약자에게 부드럽게 스며들고, 수수밥은 비위를 보하고, 수수 팥밥은 혈액을 맑게 한다. 땅의 조건을 읽어 쓰는 것처럼, 사람의 조건을 읽어 음식을 쓰는 것, 이것이 곧, 지(地)의 응용이다.

 넷째는 장(將), 마음을 다스리는 리더의 덕이다. 수수는 다루기 까다로운 곡식이다. 껍질을 벗기고 찧는 과정이 번거롭고, 익히면 쉽게 부서진다. 그러나 정성을 다해 불을 조절하고 부드럽게 다루면 곱고 단단한 밥이 된다. 이 과정이 바로 장의 도다.

 마음을 급하게 먹지 않고, 한 알 한 알을 살피며 음식을 빚는 일은 곧 스스로를 다스리는 일이다. 따뜻한 수수차 한 잔, 정성을 들인 수수부꾸미 한 조각이 주는 평온함은 마음의 수양이다. 지도자의 덕이 외부의 힘이 아니라 내면의 평정에서 나오듯, 음식도 결국 마음이 빚는다.

 마지막은 법(法), 질서다. 수수를 다룰 때도 조상들은 나름의 법도를 지켰다. 음력 5월 파종, 9월 수확, 절기마다 찧고 말리고 저장하는 순서가 있었다. 수수 차를 만들 때는 먼저 약불에 볶아 습기를 날리고, 충분히 말린 뒤 우렸다. 수수 국수는 밀가루와의 비율을 일정하게 지켜야 면발이 끊어지지 않는다.

 이런 반복되는 절차와 습관이 바로 법의 실천이다. 양생학에서 법은 곧 생활 습관이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하고, 절기에 맞춰 몸의 리듬을 조정하며, 과식·야식을 줄이는 꾸준한 실천, 이것이야말로 저속노화의 핵심이다.

 수수 약선 밥상의 예를 정리해봤다.

 수수죽은 불린 수수와 쌀을 2:8 비율로 섞어 중불에 천천히 끓인다. 여기에 대추 두 알과 생강 한 조각을 더 하면 기를 보하고 속을 따뜻하게 하는 보양식이 된다.

 수수차는 깨끗이 씻은 수수를 약불에서 은근히 볶아 찬 기운을 날린 뒤, 끓는 물에 우려 마신다. 습을 제거하고 속을 덥히는 데 효과적이다.

 수수 팥밥은 수수의 온기와 팥의 해독력이 만나 혈액순환을 돕고 손발이 찬 사람, 혈색이 좋지 않은 이에게 유익하다.

 수수부꾸미는 찰수수 반죽에 팥소를 넣어 노릇하게 부쳐낸다. 단맛은 있지만 몸을 차게 하지 않고, 면역과 순환을 돕는 양생 디저트라 할 수 있다.

 오늘 우리의 밥상이 잃어버린 것은 어쩌면 '곡식의 정신'일지도 모른다. 고단한 시대를 버텨낸 어머니의 수수밥, 새벽이슬 맞은 들녘의 붉은 이삭, 아이 돌상 위의 수수팥떡 속에는 모두 같은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수수는 한민족의 생명력, 정신, 그리고 음식의 철학이다. 자연을 밥상에 담는 일, 그것이 곧 양생의 시작이며 저속노화의 비밀이다.

 화려한 음식이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진정한 승리의 밥상은 단순함 속에 있다. 수수밥 한 그릇은 거칠지만 단단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중심을 잡아준다. 몸의 비위를 안정시키고, 마음의 불안을 가라앉히며, 세상의 변화를 담담히 받아들이게 한다. 수수밥 한 그릇이 바로 삶의 방향을 세우는 시계의 밥상이자, 양생의 출발점이며, K-푸드가 다시 곡식의 정신으로 돌아갈 첫걸음이다.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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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마운자로·고용량 위고비 국내 상륙 초읽기
내년 비만치료제 시장은 먹는 제형과 고용량 제품을 중심으로 재편될 전망이다. 일라이 릴리 등 글로벌 빅파마가 관련 신제품의 한국 출시를 서두르는 가운데 국산 비만치료제도 본격 시장에 진입한다. 4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일라이 릴리의 먹는 비만치료제 '오포글리프론'은 내년 미국 출시에 이어 한국에도 빠르게 도입될 것으로 기대된다. '먹는 마운자로'로도 불리는 오포글리프론은 하루 1번 섭취하는 글루카곤 유사 펩티드-1(GLP-1) 비만 치료제다. 일라이 릴리는 올해 안에 미국 식품의약품청(FDA)에 오포글리프론 허가를 신청해 내년 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FDA 신속 승인 제도를 거치면 연내 승인 여부가 결정될 수도 있다. 회사는 이 제품 출시를 앞두고 이미 충분한 수량을 확보했다. 데이브 릭스 일라이 릴리 대표는 최근 인터뷰에서 오포글리프론 수십억회분 제품 생산을 마쳤다고 전한 바 있다. 업계 관계자는 "수량이 많은 만큼 미국에서 허가되면 한국에도 신속하게 출시될 것으로 보인다"고 기대했다. 실제 한국릴리는 오포글리프론의 빠른 국내 도입을 위해 일라이 릴리와 논의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라이 릴리는 마운자로의 고용량 제품인 12.5㎎, 15㎎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