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긴 의정 갈등의 터널에서 벗어난 뒤 다시 지난한 논의 끝에 의대 정원을 늘린 배경으로는 지역 간 의료 격차와 필수·공공의료의 붕괴 위기가 꼽힌다.
인구 고령화로 의료 수요가 증가하는 와중에도 필수의료 과목에서는 갈수록 의사를 구하기 힘들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인력 등 의료 요건이 악화해서다.
의료계가 정원 확대를 통해 의사 수를 늘려도 이상적인 지역 배분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 우려하는 가운데 정부는 늘어난 정원을 전부 '의무 복무형' 지역의사로 양성함으로써 지역 간 의료 격차를 줄인다는 방침이다.
보건복지부는 1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제7차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 회의를 열고 2027년 490명, 2028∼2029년 각 613명, 2030년 이후 매년 813명 등 5년간 증원 규모를 총 3천342명(연평균 668명)으로 정했다.
정부는 앞서 2025학년도 의대 정원을 종전보다 2천명 많은 5천58명으로 늘렸다가 의료계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과 의대생들의 교육 현장 이탈 등 1년 반이 넘는 초유의 의정 갈등을 겪은 후에도 정부는 '지필공'(지역·필수·공공의료) 강화를 목표로 다시금 정원 증원을 추진했다.

◇ 지역별 의사 수·건강수명 차이 커…치료 가능 사망자, 지방으로 갈수록 ↑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신고 현황을 보면 지난해 말 기준 한국의 의사 수는 14만240명이고, 활동 의사 수는 11만5천748명이다.
인구 1천명당 의사 수가 2.2명인 셈이다.
그러나 지역별로는 격차가 크다.
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8월 현재 종합병원 이상 의료기관만 따졌을 때 인구 1천명당 의사 수는 서울이 1.28명인 반면 경북(0.43명)과 충남(0.45명), 전남(0.51명)에서는 0.5명 수준에 그친다.
2022년 기준 지역별 건강수명은 서울이 70.81세였으나 전남은 68.34세, 전북은 68.68세, 경남은 69.22세 등으로 70세를 밑돌았다.
즉 아프지 않고 살 수 있는 기간이 서울에서는 70세를 넘지만, 지방 여러 곳에서는 그보다 짧다는 뜻이다.
2023년 기준 인구 10만명당 치료 가능 사망자 수는 서울이 39.6명, 충북이 49.9명, 강원이 49.2명이다. 치료가 시의적절하고 효과적으로 이뤄졌다면 살 수 있었던 사람의 수가 지방으로 갈수록 많다는 것이다.

◇ 상급병원 절반 가까이가 수도권 소재…계속되는 서울 원정 진료
서울에 많은 보건의료 인프라가 몰려있기 때문에 '원정 진료'도 끊이지 않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2024 지역별 의료이용 통계연보'를 보면 그해 서울 소재 의료기관에서 진료받은 사람은 모두 1천503만여명으로, 이 가운데 623만5천명(41.5%)가량이 다른 지역에서 온 환자였다.
타지 환자들이 서울 의료기관에서 쓴 진료비는 10조8천55억원에 달했다.
서울 의료기관의 타지 환자 유입 비율은 2014년 36.3% 수준에서 꾸준히 상승해 2022년 이후엔 줄곧 40%대를 웃도는 형편이다.
이 밖에 의료기관 가운데 최상위 진료 여건을 갖춘 상급종합병원 47곳 중 23곳은 수도권(서울 14곳)에 몰려있다.
상급종합병원이 없는 시도는 전국에 4곳이나 된다.
또 도(道) 지역의 병원급 병상은 2021∼2025년 26.4%나 줄어 수도권 감소율(12.7%)의 두 배를 넘었다.
의사들의 수도권 유출도 심각한데, 서울 소재 수련병원의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65%, 산부인과 전공의 63%가 지역 출신이다.
◇ 시니어 의사 활용 등 단기 정책 병행…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무너져 가는 지역·필수의료를 살리고자 중장기 방안으로 증원을 추진한 정부는 시니어 의사, 계약형 지역필수의사(전문의) 등 기존 인력 활용을 단기 방안으로 내세웠다.
또 올해 말 개정 의료법 시행을 계기로 농·어촌 의료취약지 대상 보건소 비대면진료·협진을 활성화하고,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취약지 주민에게 생활 습관 분석, 질병 예측 등 의료 서비스도 제공한다.
이와 함께 정부는 상반기 중 지역·필수·공공의료 등 보건의료 기반 강화 대책도 따로 마련한다.
내년 1월 1조1천억원 이상의 지역 필수의료 특별회계를 신설해 재정 투자를 활성화하고, 형사 절차 개선 등 의료사고 안전망도 구축한다.
특히 '반의사불벌'을 경상해에서 중상해까지 확대해 환자 측이 명시적으로 의료 사고에 대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할 경우 기소를 제한할 계획이다.
정은경 복지부 장관은 "이번 결정은 지역·필수·공공의료 개혁을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라며 "정부는 의사 인력 양성을 위한 정책을 시작으로 다양한 정책을 국민, 의료 현장 전문가들과 함께 만들어 책임감 있게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